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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admin@slotnara.info
2024년 12월3일 불법 비상계엄을 국민들과 함께 막아낸 국회의사당 입구에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 대한민국 국회’라고 쓰인 너럭바위가 있다. ⓒ시사IN 조남진
“그날은 평범한 날이었다.” 지난해 12월3일을 떠올려달라는 질문에 국회의장실 비서관들은 같은 대답을 했다. 공식 일정을 마친 뒤 퇴근하고 잘 준비를 하거나, 늦은 저녁을 먹거나, 밀린 집안일을 하고 있었다. 너무 평범해서 기억나지 않을 정도의 밤이었다. 22시23분 윤석열이 긴급 대국민 담화를 하기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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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체절명의 밤, 각기 다른 위치에 있던 이들은 그 직후 국회로 향했다. 목적은 단 하나, 본회의를 열어 비상계엄을 해제하는 것. 누군가는 ‘죽을 각오’를 했고 또 누군가는 ‘살기 위해서’ 국회로 갔다. 이날 재석의원 190명 전원 찬성으로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가결되기까지 분초를 다투는 의사결정과 판단이 바다이야기릴게임2 쉼 없이 이어졌다. 시시각각 변하는 비상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국회 당직자와 보좌진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날 밤, 국회는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였고 이를 뒷받침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자리 지키기’가 있었다.
불법 비상계엄 이후 1년이 지났다. 〈시사IN〉은 2024년 12월3일 바다이야기부활 밤 컨트롤타워 역할을 했던 국회의장실을 중심으로 계엄 해제 과정을 돌아보고자 한다. 그간 우원식 국회의장이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종종 그 과정을 설명했지만 그와 함께 손발을 맞춘 실무진의 이야기는 드물었다. 계엄 당일 1980년 5월 광주를 떠올렸다는 이들은 “먼 훗날 비슷한 위기가 닥쳤을 때 12월3일 밤을 참고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바다이야기프로그램 그날 민주주의는 어떻게 가까스로 지켜졌는가. 국회의장실을 중심으로 11명의 기억을 조각조각 모아 ‘6시간’을 재구성했다(국회의장실 소속이 아닌 인물도 있다). 11월29일과 30일 〈시사IN〉 유튜브 채널에서 ‘12·3 쿠데타 1주년 특집 다큐멘터리-당신의 6시간’ 1·2부가 각각 공개될 예정이다.
#12월3일 22 바다이야기고래출현 시23분윤석열 긴급 대국민 담화
김성록 국회의장 경호대장은 ‘비상계엄’ 네 글자를 보고 AI가 만든 가짜뉴스라고 생각했다. 그는 서울경찰청 소속으로 국회의장 경호를 담당한다. 공식 일정을 마치고 서울 용산구 한남동 국회의장 공관으로 퇴근해 쉬는 중이었다. TV 화면에 ‘생방송’ 표시가 뜨고 나서야 실제 상황임을 알게 되었다. “광주에서 학교를 다녀서 비상계엄의 의미를 알고 있었어요. 군과 경찰이 동원되어 정치인이 체포될 수 있다는 생각이 바로 들었죠.” 입법부 수장인 국회의장은 가장 먼저 타깃이 될 가능성이 컸다. 우원식 의장이 국회로 갈 것 같다는 판단에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시사IN 조남진"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512/08/sisain/20251208064608573enbd.jpg" data-org-width="1280" dmcf-mid="xnBNfix2Rs"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2/08/sisain/20251208064608573enbd.jpg" width="658">
11월11일 우원식 국회의장이 국회의장 접견실에서 <시사IN>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시사IN 조남진
공관에 있던 우원식 의장도 그때 소식을 들었다. ‘이거 하려고 그렇게 국회를 무시했구나.’ 국회의장으로 취임한 지 6개월 차였다. “보통은 입법부 협조를 구해야 하니 국회의장이 취임하면 축하 전화를 하는 것이 상례인데 그런 게 없었어요. 취임 다음 날 현충일 행사에서 만났는데 아는 척도 안 하는 거예요. 대통령이 국회 개원식에 불참한 것도 민주화 이후 처음이었습니다.” 윤석열은 담화문에서 국회와 더불어민주당을 향한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우리 국회는 범죄자 집단의 소굴’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들을 일거에 척결’ 같은 표현이 등장했다. “계엄을 6개월 준비했다면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다, 이거 큰일 났다고 생각했죠.”
#22시38분
우원식 의장과 김성록 경호대장, 또 다른 경호 당직자가 공관을 나섰다. 국회로 가는 차 안에서 세 사람은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는 주변에 누가 따라오나 계속 살펴보고, 경호 당직자는 운전하고, 의장님은 계속 전화를 받고 있었죠. 그냥 각자의 행동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김성록 경호대장).” 김 경호대장에게 연락이 쏟아졌지만 그는 응답하지 않았다. 위치가 노출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한남대교를 건너는데 차가 막혔다.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다. 김성록 대장은 “혹시라도 검문검색을 하면 바로 직진한다”라고 경호 당직자에게 지시했다. 평균 30분이 걸리는 거리를 이날 15~16분 만에 주파했다.
#22시58분 국회의장 국회 월담
국회 3문(의원회관과 소통관 사이)에 도착하니 경찰 버스들이 이미 출입구를 막고 있었다. 우원식 의장은 이 모습을 보고 화가 났다. “국회를 지키라고 있는 경찰이 국회의원들의 출입을 막는 상황은 잘못된 거죠.” 차에서 내리려던 그를 김성록 대장이 붙잡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의장을 안전하게 모셔야 한다는 국회의장 참모의 연락이 있었다. 경찰의 눈을 피해 빈틈을 찾았다. 후문 쪽으로 가니 비교적 낮은 담벼락이 보였다. 국회 식물원 바로 앞에 발을 디딜 수 있는 격자무늬 철문이 있었다.
김성록 국회의장 경호대장은 지난해 12월3일 밤 우원식 의장이 월담하는 장면을 사진으로 찍었다. ⓒ시사IN 박미소
“여기서 내리자.” 우 의장이 말했다. 가로등이 많지 않아 주변이 어둑어둑했다. 먼저 철문을 넘어간 김성록 대장이 주변을 살피고 있는데 우 의장이 뒤따라 넘어오고 있었다. “깜짝 놀랐어요. ‘도와드릴까요’ 하며 다가갔는데 의장님이 ‘국회의장이 담을 넘어야 하네’ 그런 말을 조용히 하시더라고요.” 김성록 대장은 그 순간을 카메라로 남겨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2시58분, ‘우원식 월담 사진’이 찍힌 시각이다.
국회의장 집무실이 있는 본관 3층에 도착하자 불이 꺼져 캄캄했다. 김성록 경호대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둘이서 복도를 걷는 소리가 터벅터벅 울리는데 꼭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 같았어요. 어둡고 긴 터널을 쭉 걸어가는 느낌, 앞으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그런 느낌.” 집무실에 도착한 우 의장은 주머니에 넣어둔 국회의원 배지를 달려고 꺼냈다. 입법부 구성원임을 나타내는 신분증이었다. “그런데 의장님 손이 떨려서 제대로 착용을 못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대신 배지를 채워드렸습니다.”
우원식 의장은 그때를 “속이 속이 아닌 시간”이었다고 회고한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오랫동안 피나는 노력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투옥되었어요. 제가 국회의장으로서 비상계엄을 겪는 것 자체가 굉장히 참담한 일이었습니다. 국회 담장을 넘는다는 것이 너무 화가 나고, 아프고, 어떻게 이 시대에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 정말 눈물 나더라고요.”
#23시20분국회 본관
그 시각 이관후 국회입법조사처장도 국회로 향하고 있었다. 국회 사무처에서 의견을 물어와서 “아마 오늘 밤에 150명이 모여 계엄 해제를 못하면 국회가 마비되지 않겠느냐”라고 답했다. 국회의 입법 활동을 지원하는 기관장으로, 국회에 출근한 지 보름 만에 계엄이 터졌다. 초등학생 아들의 구멍 난 양말을 꿰매던 중이었다. “나머지 양말 한쪽은 내일 꿰매주겠다고 약속하고 나왔죠.” 곧장 택시를 탔는데, 이상했다. “강변북로를 오다 보면 과속단속 카메라가 있거든요.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는데 차들이 카메라 근처를 지날 때 다 속도를 지키더라고요. 이게 비상계엄을 발령할 상황인가.” 택시가 한남동을 지날 때쯤 헬기 소리가 들렸다.
이관후 국회입법조사처장은 비상계엄 해제를 위한 법률적 검토를 담당했다. ⓒ시사IN 조남진
이관후 처장이 국회의장실에 도착했을 때 긴급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계엄법에 따르면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하면 지체 없이 국회에 통고해야 한다고 규정돼 있는데 통고가 오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국회가 계엄 해제 절차에 착수해도 되는가? ‘지체 없이’는 언제까지로 봐야 하나? 법안과 결의안 중 어느 형태로 올릴 것인가? 언제쯤 본회의를 개의할 것인가? 국회 밖에 있는 의원들은 몇 명이나 되나? 분초를 다투는 질문들이 쏟아졌다. 논쟁도 오갔다. 이관후 처장은 이렇게 제안했다. “우선 포고령이 나왔지 않습니까. 계엄이 실제로 선포되었으니 통보가 온 것으로 간주합시다.”
부서마다 실무적인 지시와 이행이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졌다. 국회사무처 소속 황충연 경호기획관은 본회의장 문을 열라고 지시했다. 국회 다른 건물들은 일단 포기하고, 본관만 지키자고 판단했다. 국회의장실 박영선 공보기획비서관은 기자들에게 국회 상황을 실시간으로 알리는 한편, 메시지수석실에서는 곧 있을 국회의장의 대국민 담화문을 작성했다. 이관후 처장은 포고령의 위헌성과 계엄 선포 과정의 절차적 문제를 바탕으로 법률 검토에 들어갔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비서관들에게 두 가지를 당부했다. “첫째는 동이 트기 전에 끝내야 한다는 것. 출근길 시민들이 계엄군을 만나게 되면 자칫 흥분하고 그러다 유혈 사태가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둘째는 동트기 전에 계엄을 해제하되 흠이 잡히면 안 된다는 것. 우리 절차가 조금만 잘못되어도 저쪽에서 무효라고 할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절차를 지켜야 한다고 당부했죠.”
#23시57분 국회의장 첫 대국민 담화
23시47분쯤 국회 상공에 헬기가 나타났다. 송동민 비서관은 “다 같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에도 공수부대가 헬기를 타고 오잖아요. 아, 이게 진짜 계엄이구나 싶었죠.” 과거 광주에서는 통신이 차단돼 고립무원 상태가 되었다. 그 틈을 타 무자비한 국가폭력이 자행되었다. 당시 의장실에서는 ‘국민들에게 국회 상황을 알려야 한다’는 다급함이 컸다. 우원식 의장의 대국민 담화를 송출해야 하는데 국회방송 직원들이 출입이 가로막혀서 국회로 들어오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송동민 국회의장실 연설비서관은 12월3일 밤 국회의장의 대국민 담화문을 작성했다. ⓒ시사IN 조남진
그때 유튜브 채널 ‘우원식TV’을 활용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국회의장실 소속 박소정 정무비서관과 이시현 정무비서관은 급한 대로 개인 휴대전화로 라이브를 시작했다. “까만색 바탕에 ‘긴급 기자회견’ 섬네일을 만들고(이시현).” “장비도 없이 허둥지둥대면서 방송을 준비했죠(박소정).” 23시57분 국회의장의 대국민 담화가 중계되었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국회는 헌법적 절차에 따라 대응 조치하겠습니다. 국민 여러분께서는 국회를 믿고 차분히 상황을 주시해주시길 바랍니다. 모든 국회의원께서는 지금 즉시 국회 본회의장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군경은 동요하지 말고 자리를 지켜줄 것을 당부드립니다.” 계엄이 선포된 지 94분, 긴박하게 나온 국회의장의 첫 메시지였다.
그 시각 헬기를 타고 온 계엄군들이 1층 후문 안내실과 본관 2층 정현관(중앙 로비)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국회사무처에 따르면 국방부는 밤 11시48분부터 12월4일 새벽 1시18분까지 24차례 헬기를 동원해 무장한 계엄군 230여 명을 국회 경내에 진입시켰다. 이와 별도로 계엄군 50여 명이 추가로 국회 담장을 넘어 국회로 들어왔다.
#12월4일 00시10분 국회의사당 점등
“생각해보니 위치가 노출된 거잖아요.” 조오섭 국회의장 비서실장이 말했다. 대국민 담화를 마친 직후였다. 의장이 체포되면 본회의를 열 수 없다. 계엄 해제 절차도 멈춘다. 조오섭 실장은 의원들이 다 모이기 전까지 우 의장이 피신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비서관들에게 세 가지 지시를 내렸다. 국회의장이 발각되지 않도록 본관 전체에 불을 밝힐 것, 국회의장실로 가는 복도 양쪽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할 것, 그리고 본회의장 내부를 생중계할 것. “아무리 계엄군이라 할지라도 생중계로 방송되고 있다면 굉장히 두려울 거거든요.” 국회 경호과에 연락해 4층 방청석 문을 개방해달라고 요청했다. 로텐더홀에 모인 영상 기자들에게도 큰 소리로 외쳤다. “지금 본회의장에 의원들이 있으니, 그 모습을 국민들에게 전달해주십시오!”
원은설 국회의장실 정무비서관은 그날 어두웠던 국회 본관 전층의 불을 켜기 위해 뛰어다녔다. ⓒ시사IN 조남진
‘본관 전체에 불을 다 켜라’는 지시를 받고, 원은설 정무비서관은 국회를 뛰어다녔다. “빨리 켜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그냥 무조건 빨리.” 계엄군이 언제 어디서 쳐들어올지 모르는데 건물이 너무 어두웠다. 7층에서 6층으로, 5층으로 방이 많다 보니 뛰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문을 열었을 때 계엄군과 마주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서웠지만, 피하기보다는 아마 발목을 잡고 늘어지지 않았을까요.” 국회의사당은 1975년에 지어진 건물이다. 전체 점등 시스템도 없고 현대식 스위치도 아니었다. “스위치 면적이 좁아 누르는 데 힘이 들었어요. 되게 꾹꾹 눌렀던 기억이 나요.” 나중에 보니 손톱이 뒤로 꺾여 피가 나 있었다.
우원식 의장은 “그 어두운 밤을 밝힌 불빛이었다”라고 회고했다. 당시 그는 본회의장과 가깝지만 “아무도 찾지 않을 것 같은” 5층의 한 전문위원실로 피신했다. 함께 있던 김성록 경호대장은 먼발치에서 헬기 소리를 듣고 계엄군이 의장을 수색하러 들이닥칠 수 있다고 생각해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이 문이 언제 열릴까 하면서 문 손잡이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어요.” 가족에게 연락을 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영화 〈서울의 봄〉에 등장하는 김오랑 중령이 떠올랐다고 한다. “사령관을 안에 모셔놓고 밖에서 대적했던 그 상황과 100%는 아니지만 겹치더라고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온몸으로 맞서는 것뿐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00시15분 본관 앞 대치
계엄군이 등장하자 본관 2층 중앙 로비(정현관) 앞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군인들은 야간투시경에 방탄복, 특수부대용 소총으로 무장한 모습이었다. 이들의 진입을 막으려는 보좌진, 당직자, 기자들이 한데 뒤섞였다. 여기저기서 격앙된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물러가세요!” “어디 소속이시냐고요!” “누구 명령으로 왔냐고. 임무가 뭐야!” 군인들이 뒤로 물러서는 듯하더니 점점 병력이 늘었다. 보좌진들은 ‘인간 띠’를 두르고 온몸으로 막아섰고, 건물 안쪽에서는 소파와 집기 등을 이용해 바리케이드를 쌓기 시작했다.
이지환 국회의장실 정무조정비서관은 불법 계엄의 진상규명을 위해 국회의 역할이 남았다고 말했다. ⓒ시사IN 조남진
국회의장실 이지환 정무조정비서관은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다. “군인들이 소극적으로 임무를 수행했다는 것에 절반만 동의합니다. 비상계엄 발령 직후 들어왔던 군인들의 모습은 기세등등했고 거침없었어요.” 국회사무처에 따르면 사무처 직원 10여 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모두가 휴대전화로 촬영하는 모습을 보며 당황했던 것 같아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으니, 군인들이 위축되어서 소극적으로 변했어요. 군인들의 선한 의지만으로 계엄이 실패한 게 절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지환 비서관은 그날 군인들이 “굉장히 많은 양”의 생수통을 실어 나르는 것을 봤다고 했다. “오랫동안 주둔할 생각이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어요. 윤석열 얘기처럼 경고성 계엄이었다면, 군인들이 그런 군용 장비를 어떻게 헬기에 싣고 왔을까요?” 그는 특수부대로 추정되니 계엄군이 레펠(밧줄로 하강)을 이용해서 내려오거나, 벽을 부수고 올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본회의장이 위험했다. “4층 방청석 문도 다 틀어막고 바리케이드를 쌓으세요!” 이 비서관은 이렇게 지시했다.
#00시21분 본회의장 의원 소집
그때 국회 본회의장에 의원들이 150명 이상 모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원래 본회의장은 국회사무처 경위과가 소관이므로 국회의장 경호대장은 들어가지 않는다. 이날은 계엄군이 들이닥칠 상황을 대비해 김성록 경호대장이 우 의장을 따라 들어갔다. “저희 직원들에게 그랬어요. 혹시 군인들이 들어오면 의장님이 의사봉 두드릴 때까지 단상 아래에서 막아야 한다. 다리라도 잡고 지연시키자. 개머리판으로 맞더라도 참아라. 여기가 마지막이다.”
우원식 의장이 본회의장으로 들어가자 의원들이 박수를 쳤다. “김상욱 의원이 오더니 내 손을 꼭 잡고 ‘민주주의를 지켜주십시오’ 그러고서 꽉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더라고요.” 우 의장은 의원들에게 말했다. “계엄 통보가 오지 않아서 절차를 진행하기 어렵습니다. 지체 없이 통보해야 하는데 2시간이 다 되도록 통보가 오지 않은 것은 계엄을 한 대통령 쪽의 귀책사유이니 우리는 절차를 시작하겠습니다.” 우 의장은 ‘지체 없이’를 ‘2시간이 다 되도록’으로 해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본회의는 국회의장 마음대로 소집할 수 없다. 교섭단체 대표와 시간을 협의해야 한다. 국회의원들이 본회의장으로 들어올 시간을 고려해 보통은 4시간을 주는데, 이날은 그럴 수 없었다. “그 시간을 주지 않으면 헌법기관의 의결권 박탈로 절차 위반이 돼요.” 우원식 의장은 00시 28분 추경호 대표에게 전화했다. “‘어떻게 비상계엄을 할 수 있냐. 이걸 막기 위해 본회의를 열겠다. 시간은 1시간 준다’ 그랬더니 ‘시간을 더 달라’고 그러더라고요. ‘지금 이런 비상 상황에 시간을 어떻게 더 줍니까?’ 그러면서 내가 끊어버렸어요. 그래서 1시 반으로 정한 거죠.”
#00시33분 계엄군 국회 진입
바깥에서 계엄군을 막아내던 그 시각, 이관후 처장은 우원식 의장에게 “비상계엄의 성격이 내란 같다”라고 보고했다. “입법조사처의 조사관들과 통화를 해서 A4 용지 3분의 2 정도 되는 분량의 메모를 받았어요. 5·18 관련 재판의 대법원 판례들을 봤을 때 내란에 해당된다고 봤죠.” 분초를 다투는 와중에도 의장실 스태프들의 전화가 비교적 잠잠했다고 그는 말했다. 그때 계엄군이 2층 유리창을 깨고 들어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순간 거의 동시에 핸드폰이 울리더라고요.” 각자의 가족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박영선 국회의장실 공보기획비서관은 국회 상황을 실시간으로 언론에 전하며 1980년 5월 광주를 떠올렸다. ⓒ시사IN 조남진
이관후 처장도 초등학생 아들이 건 전화를 받았다. “‘아빠, 지금 군인들이 총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어’ 그러더라고요. 저랑 같이 〈서울의 봄〉을 봤거든요. 아이가 뭔가 말을 하고 싶은데 본인이 하려고 하는 말이 너무 무서워서 주저하는 게 느껴졌어요. 그러가다 ‘아빠, 오늘 집에 올 거지?’ 묻는데 울컥했어요. ‘그럼, 아빠가 틀림없이 집에 갈 거야. 기다리고 있어’ 하고 전화를 끊었어요.” 주변을 보니 다들 비슷한 통화를 하고 있었다. ‘괜찮다’ ‘걱정하지 말라’면서 가족들을 안심시켰다. “그 1분 정도가 전쟁터에서 약간의 적막 같은 느낌이었어요. 전화를 끊고 나서 저희들끼리 얼굴을 마주 보고 말없이 씩 웃었던 생각이 나요.”
계엄군이 유리창을 깨고 진입한 곳은 국회의사당 우측에 있는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실이었다. 황충연 경호기획관은 “인간에 대한 신뢰가 깨지는 순간”이었다고 기억한다. “갈 때까지 가겠다는 의미잖아요. 상상하기 싫은 일이 벌어지겠구나. 우리 역량으로는 총을 막을 수 없는데, 이 시간을 어떻게 버티나.”본회의장에 진입할 수 있는 여러 출입구에 군인들이 나타났다 후퇴하기를 반복했다. 게릴라 작전처럼 어디서 들어올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그가 본회의장 앞을 지키는 경호과 직원들에게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조금만 더 버텨보자’고 당부하는 사이, CCTV가 있는 관제실에서는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실시간 보고가 의장실로 전해지고 있었다.
#00시48분 본회의 개의
그 당시 본회의장 4층 방청석에서 이시현, 박소정 비서관은 ‘우원식TV’로 본회의장을 중계하고 있었다. “안에 있다 보니 바깥 상황을 몰랐는데 본회의장으로 들어오는 입구 쪽이 덜컹거리더라고요. 저 문이 뚫리면 군인이 들어오는 거잖아요.” 박영선 비서관은 1980년 광주를 떠올렸다. “3층에 있는데 머리 위로 군홧발 같은 소리가 쿵쿵쿵쿵 들렸어요. 광주 시민들이 그랬듯 마지막 전남도청을 사수한다는 마음으로 국회에 왔거든요. 죽을 각오를 하고 왔는데 실제 눈으로 보니까 전쟁 같은 상황이구나, 정말 아찔했어요.”
박소정(왼쪽), 이시현 국회의장실 정무비서관은 유튜브 ‘우원식TV’로 본회의장 모습을 생중계했다. ⓒ시사IN 조남진
00시38분, 우원식 의장은 추경호 원내대표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계엄군이 유리창을 깨고 들어왔기 때문에 비상이다. 본회의를 30분 당겨서 1시에 하겠다’ 그렇게 얘기했어요. 추 대표가 ‘안 됩니다. 시간을 좀 더 주십시오. 국회 문이 막혀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더라고요. 근데 이미 국회 사무총장과 경호기획관이 국회 경비대에 난리 쳐서 문을 두 번 열었단 말이에요. 그때 의원들이 많이 들어왔어요. ‘여당 대표가 경찰과 협의하고 문 열고 들어와라. 우리도 다 담 넘어서 들어왔다’ 그랬죠.”
00시48분, 우원식 의장은 본회의 개의 선언을 했다. 그사이 본회의장에 모인 의원들은 “계엄군이 국회로 진입했다”라며 표결을 서둘러야 한다고 재촉했다. 우 의장은 자제를 요청했다. “국회의장도 마음이 급합니다. 절차는 지켜야 할 거 아닙니까!”
필요한 절차 중 하나는 안건, 즉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 상정이었다. 국회 직원들이 퇴근한 시간이었기 때문에 평상시처럼 충분한 인력이 본회의를 준비할 수 없었다. 이관후 처장이 꼽은 그날 밤의 가장 큰 실무적 난관이었다. “사무처 직원 4명이 해야 할 일을 한 명이 했던 거예요. 1시 전까지 의안이 완성되어 본회의장 단말기에 뜰 수 있을까 조마조마했죠.” 한쪽에서는 계엄군을 막고, 다른 쪽에서는 안건을 본회의장에 올려야 했다. 두 개 중 하나라도 실패하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1시까지는 (계엄군을) 막아야 한다.” 김민기 국회 사무총장의 지시였다.
00시56분, 안건이 본회의에 올라왔다. 우원식 의장은 약속했던 대로 오전 1시 정각에 표결 절차에 돌입했다. 1시1분, 의사봉을 세 번 두드리며 그는 말했다.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의원석에서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1시1분비상계엄 해제 결의안 통과
“의사봉 두드릴 때 그 심정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워요. 침착하고 태연한 척했지만 얼마나 속이 탔겠어요.” 우원식 의장은 말했다. ‘우리가 해냈다’는 안심도 잠시, 끝이 아닐 수 있겠다는 불안이 스쳤다. “우리는 절차를 지켰지만 군인들까지 동원해서 국회를 침탈한 세력이 과연 이걸 수용할까?” 우원식 의장은 산회를 선포하지 않았다. 의원들도 본회의장을 떠나지 않았다.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통과된 직후, 이지환 비서관을 포함한 모든 직원이 본회의장 바깥으로 나가 계엄군들을 향해 소리쳤다. “12월4일 1시1분 부로 국회에서 적법하게 비상계엄 해제 의결을 했으니 군인들은 여기서 물러나야 합니다. 국회의 정당한 의사 활동을 방해하는 것은 나중에 처벌받을 수 있습니다!” 처음엔 무작정 밀고 들어오려던 계엄군들이 당황한 듯 우왕좌왕하더니 한 발짝씩 뒤로 물러났다.
황충연 국회사무처 경호기획관은 본회의장 문을 개방해 계엄 해제를 위한 본회의가 열리도록 도왔다. ⓒ시사IN 조남진
황충연 경호기획관은 국회 이곳저곳을 다니며 ‘비상계엄이 해제되었다’고 외치느라 목이 다 쉬었다. 그때 처음 계엄군들과 가까이서 마주쳤다. 젊은 군인들로 보였다. “이 친구들도 마음이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유사시에 자기 목숨 내놓고 전투에 투입되는 군인들인데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안쓰러운데 수고했다는 말도 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나가는 군인들 어깨를 두드려줬어요. 그런데 어깨가 강철이더라고요. 그런 친구들이 여기서 물리적 충돌을 일으켰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쳤을까.”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국무회의를 소집한다는 소식이 없었다. 오전 3시경, 아직도 군인들이 국회에 남아 있다는 보고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2차 계엄이 시도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불안감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조오섭 비서실장은 “하나는 헬기가 다시 국회로 진입하고 있다는 정보가 있었고, 또 하나는 한남동으로 계엄군이 버스 10대에 나눠 타고 진입하고 있다는 정보들이 있어서 국방부 차관에게 네다섯 차례 통화하며 그에 대한 정보를 확인해달라고 요청했다”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오전 4시, 우원식 의장이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대통령은 즉시 비상계엄을 해제하라”고 촉구했다.
조오섭 국회의장 비서실장은 계엄 해제 이후에도 2차 계엄 가능성을 보고받았다. ⓒ시사IN 조남진
30분 뒤 국무회의에서 계엄 해제 안건을 승인했다는 속보가 떴다. 우원식 의장은 기사만 보고 따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오보를 믿고 행동했다가는 크게 당할 수 있었어요. 우리 참모들과 의원들에게 국무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확인을 해달라고 했는데 아무도 통화가 안 되더라고요.” 오전 5시50분, 우 의장이 한덕수 국무총리에게 전화했다. “(한 전 총리가) ‘죄송합니다’ 그러길래 ‘죄송한 거 말고 비상계엄 해제 의결했습니까?’ 물었어요. 4시 반에 했다고 하더라고요.” 직접 확인을 하고 나서야 안도했다. 오전 5시54분, 우 의장은 이 사실을 알리며 본회의 정회를 선포했다.
#그날 이후
국회의장을 비롯해 대다수 직원들이 그날 이후 며칠간 국회에서 숙식을 했다. 간이 침대를 펴놓거나 의자에 쪼그려서 잠을 청했다. 혹시 모를 2차 계엄 발생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윤석열 탄핵소추안이 통과되기까지 숨가쁘고 긴박한 나날이 이어졌다. 12월14일 탄핵소추안 표결 당일 우원식 의장은 의원회관 옥상에서 여의도 집회에 모인 인파를 봤다. “정말 눈물 나더라고요. 저런 국민들이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지켜지는구나. 탄핵안이 가결되고 국민들에게 고맙다고 한마디라고 하고 싶어서 거리에 나왔는데, 저를 본 국민들이 오히려 고맙다고 해요. 그때 그 마음은 표현이 어렵더라고요.”
2024년 12월3일 밤, 국회는 분명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였다. 폭거가 문턱까지 쳐들어왔지만, 끝내 정의를 지켜냈다. 비상계엄 발령부터 해제까지 6시간이 걸렸다. 유례없이 신속하고 빠른 대응이었다. “짧은 순간 가장 최선의 판단을 내렸다. 합이 잘 맞았던 것 같다(조오섭)” “긴박한 순간에 각자가 있어야 할 위치를 지켰다(이시현)” “빠듯했지만 절차적 정당성을 목숨처럼 지키려고 했다(이관후)” 등 저마다 평가가 조금씩 달랐다. 송동민 비서관에게는 “더 이상 계엄을 해도 흔들리지 않는 나라기 되었구나를 명확히 증명했던 밤”이었고, 황충연 경호기획관에게는 “먼 미래 후손들에게 비슷한 위기가 닥쳤을 때 교과서처럼 활용하길 바라는 시간”이었다.
12월4일 밤 국회의사당 불을 환하게 밝혔던 원은설 비서관은 “그날 국회에 죽으러 간 게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모두가 다 살기 위해서 모여든 밤이었어요. 우리나라 역사에서 죽은 자들의 이야기가 많았잖아요. 한강 작가 소설에 등장하는 5·18 광주부터 최근의 세월호·이태원 참사까지, 죽은 자들이 미처 살지 못한 날들이 있었고, 우리가 그걸 다 기억하기 때문에 그날 밤 살기 위해 국회로 다 모여들었다고 생각해요.” 이지환 비서관은 12·3 내란 1주년이 지난 이후에도 국회의 역할이 여전히 크다고 했다. “솜방망이 처벌이 되거나 조사 대상자가 듬성듬성 빠져선 안 됩니다. 이 일의 시작과 끝이 어디였는지 명확히 진상규명을 해서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게끔 하는 조치는 아직 국회에 남아 있는 숙제입니다.”
기획 최한솔·김세욱·이한울 PD / 글 김영화 기자 soru@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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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평범한 날이었다.” 지난해 12월3일을 떠올려달라는 질문에 국회의장실 비서관들은 같은 대답을 했다. 공식 일정을 마친 뒤 퇴근하고 잘 준비를 하거나, 늦은 저녁을 먹거나, 밀린 집안일을 하고 있었다. 너무 평범해서 기억나지 않을 정도의 밤이었다. 22시23분 윤석열이 긴급 대국민 담화를 하기 전까지.
검증완료릴게임
절체절명의 밤, 각기 다른 위치에 있던 이들은 그 직후 국회로 향했다. 목적은 단 하나, 본회의를 열어 비상계엄을 해제하는 것. 누군가는 ‘죽을 각오’를 했고 또 누군가는 ‘살기 위해서’ 국회로 갔다. 이날 재석의원 190명 전원 찬성으로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가결되기까지 분초를 다투는 의사결정과 판단이 바다이야기릴게임2 쉼 없이 이어졌다. 시시각각 변하는 비상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국회 당직자와 보좌진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날 밤, 국회는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였고 이를 뒷받침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자리 지키기’가 있었다.
불법 비상계엄 이후 1년이 지났다. 〈시사IN〉은 2024년 12월3일 바다이야기부활 밤 컨트롤타워 역할을 했던 국회의장실을 중심으로 계엄 해제 과정을 돌아보고자 한다. 그간 우원식 국회의장이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종종 그 과정을 설명했지만 그와 함께 손발을 맞춘 실무진의 이야기는 드물었다. 계엄 당일 1980년 5월 광주를 떠올렸다는 이들은 “먼 훗날 비슷한 위기가 닥쳤을 때 12월3일 밤을 참고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바다이야기프로그램 그날 민주주의는 어떻게 가까스로 지켜졌는가. 국회의장실을 중심으로 11명의 기억을 조각조각 모아 ‘6시간’을 재구성했다(국회의장실 소속이 아닌 인물도 있다). 11월29일과 30일 〈시사IN〉 유튜브 채널에서 ‘12·3 쿠데타 1주년 특집 다큐멘터리-당신의 6시간’ 1·2부가 각각 공개될 예정이다.
#12월3일 22 바다이야기고래출현 시23분윤석열 긴급 대국민 담화
김성록 국회의장 경호대장은 ‘비상계엄’ 네 글자를 보고 AI가 만든 가짜뉴스라고 생각했다. 그는 서울경찰청 소속으로 국회의장 경호를 담당한다. 공식 일정을 마치고 서울 용산구 한남동 국회의장 공관으로 퇴근해 쉬는 중이었다. TV 화면에 ‘생방송’ 표시가 뜨고 나서야 실제 상황임을 알게 되었다. “광주에서 학교를 다녀서 비상계엄의 의미를 알고 있었어요. 군과 경찰이 동원되어 정치인이 체포될 수 있다는 생각이 바로 들었죠.” 입법부 수장인 국회의장은 가장 먼저 타깃이 될 가능성이 컸다. 우원식 의장이 국회로 갈 것 같다는 판단에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시사IN 조남진"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512/08/sisain/20251208064608573enbd.jpg" data-org-width="1280" dmcf-mid="xnBNfix2Rs"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2/08/sisain/20251208064608573enbd.jpg" width="658">
11월11일 우원식 국회의장이 국회의장 접견실에서 <시사IN>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시사IN 조남진
공관에 있던 우원식 의장도 그때 소식을 들었다. ‘이거 하려고 그렇게 국회를 무시했구나.’ 국회의장으로 취임한 지 6개월 차였다. “보통은 입법부 협조를 구해야 하니 국회의장이 취임하면 축하 전화를 하는 것이 상례인데 그런 게 없었어요. 취임 다음 날 현충일 행사에서 만났는데 아는 척도 안 하는 거예요. 대통령이 국회 개원식에 불참한 것도 민주화 이후 처음이었습니다.” 윤석열은 담화문에서 국회와 더불어민주당을 향한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우리 국회는 범죄자 집단의 소굴’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들을 일거에 척결’ 같은 표현이 등장했다. “계엄을 6개월 준비했다면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다, 이거 큰일 났다고 생각했죠.”
#22시38분
우원식 의장과 김성록 경호대장, 또 다른 경호 당직자가 공관을 나섰다. 국회로 가는 차 안에서 세 사람은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는 주변에 누가 따라오나 계속 살펴보고, 경호 당직자는 운전하고, 의장님은 계속 전화를 받고 있었죠. 그냥 각자의 행동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김성록 경호대장).” 김 경호대장에게 연락이 쏟아졌지만 그는 응답하지 않았다. 위치가 노출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한남대교를 건너는데 차가 막혔다.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다. 김성록 대장은 “혹시라도 검문검색을 하면 바로 직진한다”라고 경호 당직자에게 지시했다. 평균 30분이 걸리는 거리를 이날 15~16분 만에 주파했다.
#22시58분 국회의장 국회 월담
국회 3문(의원회관과 소통관 사이)에 도착하니 경찰 버스들이 이미 출입구를 막고 있었다. 우원식 의장은 이 모습을 보고 화가 났다. “국회를 지키라고 있는 경찰이 국회의원들의 출입을 막는 상황은 잘못된 거죠.” 차에서 내리려던 그를 김성록 대장이 붙잡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의장을 안전하게 모셔야 한다는 국회의장 참모의 연락이 있었다. 경찰의 눈을 피해 빈틈을 찾았다. 후문 쪽으로 가니 비교적 낮은 담벼락이 보였다. 국회 식물원 바로 앞에 발을 디딜 수 있는 격자무늬 철문이 있었다.
김성록 국회의장 경호대장은 지난해 12월3일 밤 우원식 의장이 월담하는 장면을 사진으로 찍었다. ⓒ시사IN 박미소
“여기서 내리자.” 우 의장이 말했다. 가로등이 많지 않아 주변이 어둑어둑했다. 먼저 철문을 넘어간 김성록 대장이 주변을 살피고 있는데 우 의장이 뒤따라 넘어오고 있었다. “깜짝 놀랐어요. ‘도와드릴까요’ 하며 다가갔는데 의장님이 ‘국회의장이 담을 넘어야 하네’ 그런 말을 조용히 하시더라고요.” 김성록 대장은 그 순간을 카메라로 남겨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2시58분, ‘우원식 월담 사진’이 찍힌 시각이다.
국회의장 집무실이 있는 본관 3층에 도착하자 불이 꺼져 캄캄했다. 김성록 경호대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둘이서 복도를 걷는 소리가 터벅터벅 울리는데 꼭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 같았어요. 어둡고 긴 터널을 쭉 걸어가는 느낌, 앞으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그런 느낌.” 집무실에 도착한 우 의장은 주머니에 넣어둔 국회의원 배지를 달려고 꺼냈다. 입법부 구성원임을 나타내는 신분증이었다. “그런데 의장님 손이 떨려서 제대로 착용을 못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대신 배지를 채워드렸습니다.”
우원식 의장은 그때를 “속이 속이 아닌 시간”이었다고 회고한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오랫동안 피나는 노력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투옥되었어요. 제가 국회의장으로서 비상계엄을 겪는 것 자체가 굉장히 참담한 일이었습니다. 국회 담장을 넘는다는 것이 너무 화가 나고, 아프고, 어떻게 이 시대에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 정말 눈물 나더라고요.”
#23시20분국회 본관
그 시각 이관후 국회입법조사처장도 국회로 향하고 있었다. 국회 사무처에서 의견을 물어와서 “아마 오늘 밤에 150명이 모여 계엄 해제를 못하면 국회가 마비되지 않겠느냐”라고 답했다. 국회의 입법 활동을 지원하는 기관장으로, 국회에 출근한 지 보름 만에 계엄이 터졌다. 초등학생 아들의 구멍 난 양말을 꿰매던 중이었다. “나머지 양말 한쪽은 내일 꿰매주겠다고 약속하고 나왔죠.” 곧장 택시를 탔는데, 이상했다. “강변북로를 오다 보면 과속단속 카메라가 있거든요.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는데 차들이 카메라 근처를 지날 때 다 속도를 지키더라고요. 이게 비상계엄을 발령할 상황인가.” 택시가 한남동을 지날 때쯤 헬기 소리가 들렸다.
이관후 국회입법조사처장은 비상계엄 해제를 위한 법률적 검토를 담당했다. ⓒ시사IN 조남진
이관후 처장이 국회의장실에 도착했을 때 긴급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계엄법에 따르면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하면 지체 없이 국회에 통고해야 한다고 규정돼 있는데 통고가 오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국회가 계엄 해제 절차에 착수해도 되는가? ‘지체 없이’는 언제까지로 봐야 하나? 법안과 결의안 중 어느 형태로 올릴 것인가? 언제쯤 본회의를 개의할 것인가? 국회 밖에 있는 의원들은 몇 명이나 되나? 분초를 다투는 질문들이 쏟아졌다. 논쟁도 오갔다. 이관후 처장은 이렇게 제안했다. “우선 포고령이 나왔지 않습니까. 계엄이 실제로 선포되었으니 통보가 온 것으로 간주합시다.”
부서마다 실무적인 지시와 이행이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졌다. 국회사무처 소속 황충연 경호기획관은 본회의장 문을 열라고 지시했다. 국회 다른 건물들은 일단 포기하고, 본관만 지키자고 판단했다. 국회의장실 박영선 공보기획비서관은 기자들에게 국회 상황을 실시간으로 알리는 한편, 메시지수석실에서는 곧 있을 국회의장의 대국민 담화문을 작성했다. 이관후 처장은 포고령의 위헌성과 계엄 선포 과정의 절차적 문제를 바탕으로 법률 검토에 들어갔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비서관들에게 두 가지를 당부했다. “첫째는 동이 트기 전에 끝내야 한다는 것. 출근길 시민들이 계엄군을 만나게 되면 자칫 흥분하고 그러다 유혈 사태가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둘째는 동트기 전에 계엄을 해제하되 흠이 잡히면 안 된다는 것. 우리 절차가 조금만 잘못되어도 저쪽에서 무효라고 할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절차를 지켜야 한다고 당부했죠.”
#23시57분 국회의장 첫 대국민 담화
23시47분쯤 국회 상공에 헬기가 나타났다. 송동민 비서관은 “다 같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에도 공수부대가 헬기를 타고 오잖아요. 아, 이게 진짜 계엄이구나 싶었죠.” 과거 광주에서는 통신이 차단돼 고립무원 상태가 되었다. 그 틈을 타 무자비한 국가폭력이 자행되었다. 당시 의장실에서는 ‘국민들에게 국회 상황을 알려야 한다’는 다급함이 컸다. 우원식 의장의 대국민 담화를 송출해야 하는데 국회방송 직원들이 출입이 가로막혀서 국회로 들어오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송동민 국회의장실 연설비서관은 12월3일 밤 국회의장의 대국민 담화문을 작성했다. ⓒ시사IN 조남진
그때 유튜브 채널 ‘우원식TV’을 활용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국회의장실 소속 박소정 정무비서관과 이시현 정무비서관은 급한 대로 개인 휴대전화로 라이브를 시작했다. “까만색 바탕에 ‘긴급 기자회견’ 섬네일을 만들고(이시현).” “장비도 없이 허둥지둥대면서 방송을 준비했죠(박소정).” 23시57분 국회의장의 대국민 담화가 중계되었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국회는 헌법적 절차에 따라 대응 조치하겠습니다. 국민 여러분께서는 국회를 믿고 차분히 상황을 주시해주시길 바랍니다. 모든 국회의원께서는 지금 즉시 국회 본회의장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군경은 동요하지 말고 자리를 지켜줄 것을 당부드립니다.” 계엄이 선포된 지 94분, 긴박하게 나온 국회의장의 첫 메시지였다.
그 시각 헬기를 타고 온 계엄군들이 1층 후문 안내실과 본관 2층 정현관(중앙 로비)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국회사무처에 따르면 국방부는 밤 11시48분부터 12월4일 새벽 1시18분까지 24차례 헬기를 동원해 무장한 계엄군 230여 명을 국회 경내에 진입시켰다. 이와 별도로 계엄군 50여 명이 추가로 국회 담장을 넘어 국회로 들어왔다.
#12월4일 00시10분 국회의사당 점등
“생각해보니 위치가 노출된 거잖아요.” 조오섭 국회의장 비서실장이 말했다. 대국민 담화를 마친 직후였다. 의장이 체포되면 본회의를 열 수 없다. 계엄 해제 절차도 멈춘다. 조오섭 실장은 의원들이 다 모이기 전까지 우 의장이 피신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비서관들에게 세 가지 지시를 내렸다. 국회의장이 발각되지 않도록 본관 전체에 불을 밝힐 것, 국회의장실로 가는 복도 양쪽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할 것, 그리고 본회의장 내부를 생중계할 것. “아무리 계엄군이라 할지라도 생중계로 방송되고 있다면 굉장히 두려울 거거든요.” 국회 경호과에 연락해 4층 방청석 문을 개방해달라고 요청했다. 로텐더홀에 모인 영상 기자들에게도 큰 소리로 외쳤다. “지금 본회의장에 의원들이 있으니, 그 모습을 국민들에게 전달해주십시오!”
원은설 국회의장실 정무비서관은 그날 어두웠던 국회 본관 전층의 불을 켜기 위해 뛰어다녔다. ⓒ시사IN 조남진
‘본관 전체에 불을 다 켜라’는 지시를 받고, 원은설 정무비서관은 국회를 뛰어다녔다. “빨리 켜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그냥 무조건 빨리.” 계엄군이 언제 어디서 쳐들어올지 모르는데 건물이 너무 어두웠다. 7층에서 6층으로, 5층으로 방이 많다 보니 뛰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문을 열었을 때 계엄군과 마주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서웠지만, 피하기보다는 아마 발목을 잡고 늘어지지 않았을까요.” 국회의사당은 1975년에 지어진 건물이다. 전체 점등 시스템도 없고 현대식 스위치도 아니었다. “스위치 면적이 좁아 누르는 데 힘이 들었어요. 되게 꾹꾹 눌렀던 기억이 나요.” 나중에 보니 손톱이 뒤로 꺾여 피가 나 있었다.
우원식 의장은 “그 어두운 밤을 밝힌 불빛이었다”라고 회고했다. 당시 그는 본회의장과 가깝지만 “아무도 찾지 않을 것 같은” 5층의 한 전문위원실로 피신했다. 함께 있던 김성록 경호대장은 먼발치에서 헬기 소리를 듣고 계엄군이 의장을 수색하러 들이닥칠 수 있다고 생각해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이 문이 언제 열릴까 하면서 문 손잡이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어요.” 가족에게 연락을 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영화 〈서울의 봄〉에 등장하는 김오랑 중령이 떠올랐다고 한다. “사령관을 안에 모셔놓고 밖에서 대적했던 그 상황과 100%는 아니지만 겹치더라고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온몸으로 맞서는 것뿐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00시15분 본관 앞 대치
계엄군이 등장하자 본관 2층 중앙 로비(정현관) 앞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군인들은 야간투시경에 방탄복, 특수부대용 소총으로 무장한 모습이었다. 이들의 진입을 막으려는 보좌진, 당직자, 기자들이 한데 뒤섞였다. 여기저기서 격앙된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물러가세요!” “어디 소속이시냐고요!” “누구 명령으로 왔냐고. 임무가 뭐야!” 군인들이 뒤로 물러서는 듯하더니 점점 병력이 늘었다. 보좌진들은 ‘인간 띠’를 두르고 온몸으로 막아섰고, 건물 안쪽에서는 소파와 집기 등을 이용해 바리케이드를 쌓기 시작했다.
이지환 국회의장실 정무조정비서관은 불법 계엄의 진상규명을 위해 국회의 역할이 남았다고 말했다. ⓒ시사IN 조남진
국회의장실 이지환 정무조정비서관은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다. “군인들이 소극적으로 임무를 수행했다는 것에 절반만 동의합니다. 비상계엄 발령 직후 들어왔던 군인들의 모습은 기세등등했고 거침없었어요.” 국회사무처에 따르면 사무처 직원 10여 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모두가 휴대전화로 촬영하는 모습을 보며 당황했던 것 같아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으니, 군인들이 위축되어서 소극적으로 변했어요. 군인들의 선한 의지만으로 계엄이 실패한 게 절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지환 비서관은 그날 군인들이 “굉장히 많은 양”의 생수통을 실어 나르는 것을 봤다고 했다. “오랫동안 주둔할 생각이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어요. 윤석열 얘기처럼 경고성 계엄이었다면, 군인들이 그런 군용 장비를 어떻게 헬기에 싣고 왔을까요?” 그는 특수부대로 추정되니 계엄군이 레펠(밧줄로 하강)을 이용해서 내려오거나, 벽을 부수고 올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본회의장이 위험했다. “4층 방청석 문도 다 틀어막고 바리케이드를 쌓으세요!” 이 비서관은 이렇게 지시했다.
#00시21분 본회의장 의원 소집
그때 국회 본회의장에 의원들이 150명 이상 모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원래 본회의장은 국회사무처 경위과가 소관이므로 국회의장 경호대장은 들어가지 않는다. 이날은 계엄군이 들이닥칠 상황을 대비해 김성록 경호대장이 우 의장을 따라 들어갔다. “저희 직원들에게 그랬어요. 혹시 군인들이 들어오면 의장님이 의사봉 두드릴 때까지 단상 아래에서 막아야 한다. 다리라도 잡고 지연시키자. 개머리판으로 맞더라도 참아라. 여기가 마지막이다.”
우원식 의장이 본회의장으로 들어가자 의원들이 박수를 쳤다. “김상욱 의원이 오더니 내 손을 꼭 잡고 ‘민주주의를 지켜주십시오’ 그러고서 꽉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더라고요.” 우 의장은 의원들에게 말했다. “계엄 통보가 오지 않아서 절차를 진행하기 어렵습니다. 지체 없이 통보해야 하는데 2시간이 다 되도록 통보가 오지 않은 것은 계엄을 한 대통령 쪽의 귀책사유이니 우리는 절차를 시작하겠습니다.” 우 의장은 ‘지체 없이’를 ‘2시간이 다 되도록’으로 해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본회의는 국회의장 마음대로 소집할 수 없다. 교섭단체 대표와 시간을 협의해야 한다. 국회의원들이 본회의장으로 들어올 시간을 고려해 보통은 4시간을 주는데, 이날은 그럴 수 없었다. “그 시간을 주지 않으면 헌법기관의 의결권 박탈로 절차 위반이 돼요.” 우원식 의장은 00시 28분 추경호 대표에게 전화했다. “‘어떻게 비상계엄을 할 수 있냐. 이걸 막기 위해 본회의를 열겠다. 시간은 1시간 준다’ 그랬더니 ‘시간을 더 달라’고 그러더라고요. ‘지금 이런 비상 상황에 시간을 어떻게 더 줍니까?’ 그러면서 내가 끊어버렸어요. 그래서 1시 반으로 정한 거죠.”
#00시33분 계엄군 국회 진입
바깥에서 계엄군을 막아내던 그 시각, 이관후 처장은 우원식 의장에게 “비상계엄의 성격이 내란 같다”라고 보고했다. “입법조사처의 조사관들과 통화를 해서 A4 용지 3분의 2 정도 되는 분량의 메모를 받았어요. 5·18 관련 재판의 대법원 판례들을 봤을 때 내란에 해당된다고 봤죠.” 분초를 다투는 와중에도 의장실 스태프들의 전화가 비교적 잠잠했다고 그는 말했다. 그때 계엄군이 2층 유리창을 깨고 들어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순간 거의 동시에 핸드폰이 울리더라고요.” 각자의 가족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박영선 국회의장실 공보기획비서관은 국회 상황을 실시간으로 언론에 전하며 1980년 5월 광주를 떠올렸다. ⓒ시사IN 조남진
이관후 처장도 초등학생 아들이 건 전화를 받았다. “‘아빠, 지금 군인들이 총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어’ 그러더라고요. 저랑 같이 〈서울의 봄〉을 봤거든요. 아이가 뭔가 말을 하고 싶은데 본인이 하려고 하는 말이 너무 무서워서 주저하는 게 느껴졌어요. 그러가다 ‘아빠, 오늘 집에 올 거지?’ 묻는데 울컥했어요. ‘그럼, 아빠가 틀림없이 집에 갈 거야. 기다리고 있어’ 하고 전화를 끊었어요.” 주변을 보니 다들 비슷한 통화를 하고 있었다. ‘괜찮다’ ‘걱정하지 말라’면서 가족들을 안심시켰다. “그 1분 정도가 전쟁터에서 약간의 적막 같은 느낌이었어요. 전화를 끊고 나서 저희들끼리 얼굴을 마주 보고 말없이 씩 웃었던 생각이 나요.”
계엄군이 유리창을 깨고 진입한 곳은 국회의사당 우측에 있는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실이었다. 황충연 경호기획관은 “인간에 대한 신뢰가 깨지는 순간”이었다고 기억한다. “갈 때까지 가겠다는 의미잖아요. 상상하기 싫은 일이 벌어지겠구나. 우리 역량으로는 총을 막을 수 없는데, 이 시간을 어떻게 버티나.”본회의장에 진입할 수 있는 여러 출입구에 군인들이 나타났다 후퇴하기를 반복했다. 게릴라 작전처럼 어디서 들어올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그가 본회의장 앞을 지키는 경호과 직원들에게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조금만 더 버텨보자’고 당부하는 사이, CCTV가 있는 관제실에서는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실시간 보고가 의장실로 전해지고 있었다.
#00시48분 본회의 개의
그 당시 본회의장 4층 방청석에서 이시현, 박소정 비서관은 ‘우원식TV’로 본회의장을 중계하고 있었다. “안에 있다 보니 바깥 상황을 몰랐는데 본회의장으로 들어오는 입구 쪽이 덜컹거리더라고요. 저 문이 뚫리면 군인이 들어오는 거잖아요.” 박영선 비서관은 1980년 광주를 떠올렸다. “3층에 있는데 머리 위로 군홧발 같은 소리가 쿵쿵쿵쿵 들렸어요. 광주 시민들이 그랬듯 마지막 전남도청을 사수한다는 마음으로 국회에 왔거든요. 죽을 각오를 하고 왔는데 실제 눈으로 보니까 전쟁 같은 상황이구나, 정말 아찔했어요.”
박소정(왼쪽), 이시현 국회의장실 정무비서관은 유튜브 ‘우원식TV’로 본회의장 모습을 생중계했다. ⓒ시사IN 조남진
00시38분, 우원식 의장은 추경호 원내대표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계엄군이 유리창을 깨고 들어왔기 때문에 비상이다. 본회의를 30분 당겨서 1시에 하겠다’ 그렇게 얘기했어요. 추 대표가 ‘안 됩니다. 시간을 좀 더 주십시오. 국회 문이 막혀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더라고요. 근데 이미 국회 사무총장과 경호기획관이 국회 경비대에 난리 쳐서 문을 두 번 열었단 말이에요. 그때 의원들이 많이 들어왔어요. ‘여당 대표가 경찰과 협의하고 문 열고 들어와라. 우리도 다 담 넘어서 들어왔다’ 그랬죠.”
00시48분, 우원식 의장은 본회의 개의 선언을 했다. 그사이 본회의장에 모인 의원들은 “계엄군이 국회로 진입했다”라며 표결을 서둘러야 한다고 재촉했다. 우 의장은 자제를 요청했다. “국회의장도 마음이 급합니다. 절차는 지켜야 할 거 아닙니까!”
필요한 절차 중 하나는 안건, 즉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 상정이었다. 국회 직원들이 퇴근한 시간이었기 때문에 평상시처럼 충분한 인력이 본회의를 준비할 수 없었다. 이관후 처장이 꼽은 그날 밤의 가장 큰 실무적 난관이었다. “사무처 직원 4명이 해야 할 일을 한 명이 했던 거예요. 1시 전까지 의안이 완성되어 본회의장 단말기에 뜰 수 있을까 조마조마했죠.” 한쪽에서는 계엄군을 막고, 다른 쪽에서는 안건을 본회의장에 올려야 했다. 두 개 중 하나라도 실패하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1시까지는 (계엄군을) 막아야 한다.” 김민기 국회 사무총장의 지시였다.
00시56분, 안건이 본회의에 올라왔다. 우원식 의장은 약속했던 대로 오전 1시 정각에 표결 절차에 돌입했다. 1시1분, 의사봉을 세 번 두드리며 그는 말했다.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의원석에서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1시1분비상계엄 해제 결의안 통과
“의사봉 두드릴 때 그 심정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워요. 침착하고 태연한 척했지만 얼마나 속이 탔겠어요.” 우원식 의장은 말했다. ‘우리가 해냈다’는 안심도 잠시, 끝이 아닐 수 있겠다는 불안이 스쳤다. “우리는 절차를 지켰지만 군인들까지 동원해서 국회를 침탈한 세력이 과연 이걸 수용할까?” 우원식 의장은 산회를 선포하지 않았다. 의원들도 본회의장을 떠나지 않았다.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통과된 직후, 이지환 비서관을 포함한 모든 직원이 본회의장 바깥으로 나가 계엄군들을 향해 소리쳤다. “12월4일 1시1분 부로 국회에서 적법하게 비상계엄 해제 의결을 했으니 군인들은 여기서 물러나야 합니다. 국회의 정당한 의사 활동을 방해하는 것은 나중에 처벌받을 수 있습니다!” 처음엔 무작정 밀고 들어오려던 계엄군들이 당황한 듯 우왕좌왕하더니 한 발짝씩 뒤로 물러났다.
황충연 국회사무처 경호기획관은 본회의장 문을 개방해 계엄 해제를 위한 본회의가 열리도록 도왔다. ⓒ시사IN 조남진
황충연 경호기획관은 국회 이곳저곳을 다니며 ‘비상계엄이 해제되었다’고 외치느라 목이 다 쉬었다. 그때 처음 계엄군들과 가까이서 마주쳤다. 젊은 군인들로 보였다. “이 친구들도 마음이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유사시에 자기 목숨 내놓고 전투에 투입되는 군인들인데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안쓰러운데 수고했다는 말도 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나가는 군인들 어깨를 두드려줬어요. 그런데 어깨가 강철이더라고요. 그런 친구들이 여기서 물리적 충돌을 일으켰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쳤을까.”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국무회의를 소집한다는 소식이 없었다. 오전 3시경, 아직도 군인들이 국회에 남아 있다는 보고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2차 계엄이 시도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불안감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조오섭 비서실장은 “하나는 헬기가 다시 국회로 진입하고 있다는 정보가 있었고, 또 하나는 한남동으로 계엄군이 버스 10대에 나눠 타고 진입하고 있다는 정보들이 있어서 국방부 차관에게 네다섯 차례 통화하며 그에 대한 정보를 확인해달라고 요청했다”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오전 4시, 우원식 의장이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대통령은 즉시 비상계엄을 해제하라”고 촉구했다.
조오섭 국회의장 비서실장은 계엄 해제 이후에도 2차 계엄 가능성을 보고받았다. ⓒ시사IN 조남진
30분 뒤 국무회의에서 계엄 해제 안건을 승인했다는 속보가 떴다. 우원식 의장은 기사만 보고 따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오보를 믿고 행동했다가는 크게 당할 수 있었어요. 우리 참모들과 의원들에게 국무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확인을 해달라고 했는데 아무도 통화가 안 되더라고요.” 오전 5시50분, 우 의장이 한덕수 국무총리에게 전화했다. “(한 전 총리가) ‘죄송합니다’ 그러길래 ‘죄송한 거 말고 비상계엄 해제 의결했습니까?’ 물었어요. 4시 반에 했다고 하더라고요.” 직접 확인을 하고 나서야 안도했다. 오전 5시54분, 우 의장은 이 사실을 알리며 본회의 정회를 선포했다.
#그날 이후
국회의장을 비롯해 대다수 직원들이 그날 이후 며칠간 국회에서 숙식을 했다. 간이 침대를 펴놓거나 의자에 쪼그려서 잠을 청했다. 혹시 모를 2차 계엄 발생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윤석열 탄핵소추안이 통과되기까지 숨가쁘고 긴박한 나날이 이어졌다. 12월14일 탄핵소추안 표결 당일 우원식 의장은 의원회관 옥상에서 여의도 집회에 모인 인파를 봤다. “정말 눈물 나더라고요. 저런 국민들이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지켜지는구나. 탄핵안이 가결되고 국민들에게 고맙다고 한마디라고 하고 싶어서 거리에 나왔는데, 저를 본 국민들이 오히려 고맙다고 해요. 그때 그 마음은 표현이 어렵더라고요.”
2024년 12월3일 밤, 국회는 분명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였다. 폭거가 문턱까지 쳐들어왔지만, 끝내 정의를 지켜냈다. 비상계엄 발령부터 해제까지 6시간이 걸렸다. 유례없이 신속하고 빠른 대응이었다. “짧은 순간 가장 최선의 판단을 내렸다. 합이 잘 맞았던 것 같다(조오섭)” “긴박한 순간에 각자가 있어야 할 위치를 지켰다(이시현)” “빠듯했지만 절차적 정당성을 목숨처럼 지키려고 했다(이관후)” 등 저마다 평가가 조금씩 달랐다. 송동민 비서관에게는 “더 이상 계엄을 해도 흔들리지 않는 나라기 되었구나를 명확히 증명했던 밤”이었고, 황충연 경호기획관에게는 “먼 미래 후손들에게 비슷한 위기가 닥쳤을 때 교과서처럼 활용하길 바라는 시간”이었다.
12월4일 밤 국회의사당 불을 환하게 밝혔던 원은설 비서관은 “그날 국회에 죽으러 간 게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모두가 다 살기 위해서 모여든 밤이었어요. 우리나라 역사에서 죽은 자들의 이야기가 많았잖아요. 한강 작가 소설에 등장하는 5·18 광주부터 최근의 세월호·이태원 참사까지, 죽은 자들이 미처 살지 못한 날들이 있었고, 우리가 그걸 다 기억하기 때문에 그날 밤 살기 위해 국회로 다 모여들었다고 생각해요.” 이지환 비서관은 12·3 내란 1주년이 지난 이후에도 국회의 역할이 여전히 크다고 했다. “솜방망이 처벌이 되거나 조사 대상자가 듬성듬성 빠져선 안 됩니다. 이 일의 시작과 끝이 어디였는지 명확히 진상규명을 해서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게끔 하는 조치는 아직 국회에 남아 있는 숙제입니다.”
기획 최한솔·김세욱·이한울 PD / 글 김영화 기자 soru@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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