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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지난 12일(현지시간) 폐막한 제83회 베네치아국제영화제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이 영화제에서 이창동 감독은 ‘버닝’ 이후 8년 만에 내놓은 신작 ‘가능한 사랑’으로 심사위원대상(은사자상)을 수상했습니다. 현지 공개 직후부터 황금사자상의 유력 후보로 떠올랐기에 이 감독을 응원하는 목소리는 유독 컸습니다. 이 감독은 “황금사자상이 아니라서 실망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은사자상으로 충분하다”며 거장의 품격을 보여줬습니다.
영화제는 끝났지만, 이 감독의 경쟁부문 진출을 계기로 베네치아영화제를 지켜보며 들었던 여러 생각들을 꺼내볼까 합니다.
우선 올해 경쟁부문에 오른 작품 리스트를 살펴보다가 마이 엘투키 감독의 ‘언노운 우먼’(한국어 제목 ‘마리가 뭐 어때서’)을 보고 “또 2차 세계대전이야?”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이 작품은 이번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엘투키 감독은 경쟁부문에 진출한 유일한 여성 감독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유럽 영화계는 왜 80년도 더 지난 2차 세계대전과 나치에 여전히 이토록 관심을 갖는 걸까요?
사실 베네치아만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최근 몇 년만 돌아봐도 제2차 세계대전과 나치, 홀로코스트를 직간접적으로 다룬 작품들이 세계 영화제와 시상식에서 꾸준히 주목받았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2024년 베네치아에서는 미국 출신 브래디 코베 감독의 ‘브루탈리스트’가 은사자상인 감독상을 받았습니다. 이 작품 역시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계 헝가리인 건축가가 미국으로 건너와 자신이 설계한 건축물을 만드는 과정을 그린 작품입니다.
올해도 베네치아의 선택은 제2차 세계대전이었습니다. 이유는 뭘까요?
한국 관객 입장에서 보면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나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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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도 일제강。기와 한국전쟁처럼 깊은 역사적 상처가 있지만, 유럽 영화가 수십 년 동안 한 시대를 집요하게 들여다보는 방식은 조금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은 단순히 역사책 속 박제된 사건이 아닙니다. 전쟁의 흔적은 지금도 일상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 도시의 거리에는 나치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을 새긴 ‘슈톨퍼슈타인’이 보도블록에 박혀 있습니다. 오래된 건물에는 총탄 자국이 남아 있고,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의 기억은 자녀와 손자 세대에게 이어집니다. 어느 집안에는 강제수용소로 끌려간 가족의 이야기가 있고, 어느 집안에는 전쟁 당시 피란을 갔던 할머니의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역사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언제든 그 광기가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현실적인 위기감입니다.
최근 유럽 내 극우 세력의 급부상이나 유럽 대륙에서 이어지는 전쟁을 바라보면서 유럽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은 나치 시대를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인간이 윤리적으로 마비될 때 언제든 반복될 수 있는 경고판으로 소환합니다. 과거를 바라보는 것 같지만 사실은 현재를 바라보고 있는 셈입니다. 나치와 2차 세계대전의 기억이 현재의 사회적 불안을 비추는 가장 날카로운 거울이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2024년 ‘브루탈리스트’가 은사자상을 수상했던 당시 미국에서는 대선을 앞두고 있었고, 도널드 트럼프 당시 공화당 대선 후보가 재선을 노리던 시기로 극단적인 분열과 극우적 분위기가 확산됐습니다. 유럽에서도 극우정당이 세력을 확장하던 시기이기도 하고요.
올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란전쟁이 발발했고, 미국 내에서도 극우 성향 정치인들의 세력이 확장되고 있습니다. 과거사 반성의 모범국으로 불리는 독일에서도 극우 정당이 돌풍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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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 독일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은 지난 6일(현지 시간) 구동독 지역인 작센안할트주 주의회 선거에서 43.8%를 득표하며 압승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극우정당 국민연합(RN)의 마린 르펜 의원이 내년 대선의 유력 후보로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인간이 다시 광기에 휩쓸릴 수 있을까’ ‘평범한 사람들은 언제 폭력에 침묵하는가’ ‘사회는 어떤 이유로 비정상적인 것을 정상으로 받아들이는가’.
과거의 나치를 바라보는 것 같지만 결국 지금의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질문입니다. 그래서 유럽 영화는 계속 그 시대를 잊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앞서 칸영화제에서는 ‘피아니스트’가 2002년 황금종려상을, ‘하얀 리본’이 2009년 황금종려상을 받았습니다. ‘사울의 아들’은 2015년 칸 심사위원대상을 받았고, ‘존 오브 인터레스트’ 역시 2023년 칸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뒤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쉰들러 리스트’처럼 홀로코스트를 다룬 작품이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사례도 있습니다. 영화제와 당시 정치·사회적 상황을 비교해 보면 흐름을 포착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이창동 감독이 오랜 시간 영화의 투자처를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제작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 그리고 영화의 의미와 역할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노동이 사라져 가는 시대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끊어져 가는 시대에 영화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영화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질문하기 위해 만들었다. 이 상을 주신 것은 그 질문을 계속하라는 뜻으로 알겠다.”
베네치아의 선택은 바로 이 감독이 말한 영화의 의미와 역할에 응답한 것으로도 읽힙니다. 전 세계에 드리우고 있는 극단적 분열과 광기, 그리고 노동의 종말과 。. 약해지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 영화가 던져야 할 메시지를 보여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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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감독의 말대로 황금사자상이냐 은사자상이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인류를 위협하는 위험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려는 예술적 도전만으로도 ‘가능한 사랑’도, ‘언노운 우먼’도 영화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제 이후 뜻밖의 이슈도 불거졌습니다. 경쟁부문에 진출한 유일한 여성 감독에게 황금사자상이 돌아갔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이 때문에 심사위원장인 매기 질렌할이 직접 해명에 나서는 해프닝도 벌어졌습니다.
시상식 직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매기 질렌할은 이 결정이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는 시선에 대해 “사실 난 이 영화를 보지도 않았다”며 “그냥 ‘여성 감독이 만들었으니 황금사자상을 줘야겠다’라고 생각했을 뿐”이라고 뼈 있는 농담을 던졌다고 합니다.
그는 이어 “이 질문을 예상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여성 감독이 만든 영화 중에도 제가 좋아하지 않는 영화가 많다. 저도 다른 심사위원들과 마찬가지로 한 표만 행사했다”며 “모든 결정은 복잡하고 많은 논의를 거쳐 이루어진다”고 답하며, 여성 심사위원장이 여성 감독에게 상을 줬다는 의혹을 일축하기도 했습니다.
지난해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가 경쟁부문에 진출했고, 올해도 이창동 감독의 ‘가능한 사랑’이 경쟁부문에 진출했습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까지 한국 영화가 경쟁부문에 오르지 못했다면 베네치아는 지금처럼 뜨거운 관심을 받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덕분에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등 다양한 플랫폼이 쏟아지는 과잉 유통의 시대에 영화의 의미와 역할을 찬찬히 돌아보는 시간을 가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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